이야기 5

사마리아인

“굿모닝!” “그래. 상쾌한 아침... 이었으면 좋겠네.” “뭐야, 퀭한 눈은? 어제 밤샜냐? 게임?” “네가 재밌다 해서 ‘배드 사마리안(Bad Samaritan)’ 엔딩 보려고 달렸지. 근데 밤 안 새웠거든?” “그거 분기별로 선택하는 게 은근 압박이던데, 행동에 따라 스토리 진행이 엄청나게 달라지니까. 그래서 엔딩은 봤어?” “어... 그럴 뻔했는데, 이제 몸이 게임을 거부하기 시작했나 봐.” “무슨 소리야?” “뭔가 3D 화면이 울렁거리더니, 갑자기 엄청 메스껍더라고.” “뭐야. 멀미했냐?” “나는 그런 거 없는 줄 알았는데, 아무튼 머리가 엄청 아프더라고. 그래서 게임 끄고 바람 좀 쐴까 하고 집 앞 공원에 갔지.” “방구석 폐인의 모험 1장이 시작된 건가? 하하” “아무튼 공원에서 좀 웃긴 일..

그 자리에 남아있는 음악

“여기에 성함하고 연락처 적어주시면 돼요.” “네. 번호 적고... 이름을...” “기다 씨?” “네?” “와. 이름 멋지네요. 이기다 씨” “네. 좀 그렇죠?” “죄송해요. 처음 보는 이름이라. 왠지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데요?” “등록비는 카드로 결제할게요.” “네. 그런데 어쩌다 장구 배울 생각을 하게 되셨어요? 요즘은 수강생도 별로 없어서 말이죠.” “그게... 저는 뭔가 즉흥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개인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없어서 고민이었거든요. 회사 회식이나 뭐 그럴 때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예전부터 악기 하나는 꼭 다뤄보고 싶었는데 건반이나 복잡한 악기는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아-” “그리고 예전에 라디오를 많이 듣던 때가 있었는데, 우연히 틀게 된 국악 방송을 한참 들었..

부끄러움의 방문

‘띵 – 동’ “누구세요?” ‘철 – 컥’ “안녕하세요. 저는 ‘부끄러움’이라고 합니다.” “네? 뭐요?” “최근에 부끄러운 일 하신 적 있으시죠? 그것 때문에 방문했습니다.” “아니... 무슨 단체에서 오신 거 같은데, 뭐 촬영하세요?” “댁이 유명인이라도 되는 줄 아세요? 지금 장난하는 게 아닙니다.” “아니, 뜬금없이 부끄러운 일 했냐고 물으니 황당하잖아요? 아니다. 관심 없으니까 돌아가 주세요. 그럼...” “황당? 다른 얘기 해드릴까요? 혼자 잘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케케묵은 것들을 기어코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애꿎은 사람들 얼굴에 뿌렸단 말입니다. 그게 더 황당하지 않나요? 누구냐고요? 당신이죠. 직접 경고해주러 온 저를 무시하고 들어가려 하시네요?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나요?” “아니 뭐 ..

할아버지를 추모하는 방법

며칠 전 외할아버지의 5주기 날이었다. 오랜만에 외할머니댁에 모인 가족들이 기독교식 추모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준비하신 여러 음식을 먹으며 문득 매년 똑같이 흘러가는 추모의 시간이 덧없게 느껴졌다. 모여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린 후, 밥을 먹고 헤어지는 것이... 그래서 나는 한 마디 하게 됐다. “이따가 커피 마시면서 각자 할아버지와 있었던 추억 같은 걸 얘기해보면 어떨까요?” 처음엔 다들 안 해봤던 이야기 주제인지라 으잉? 하는 반응이었지만 이내 분위기는 ‘그렇게 한 번 해보지 뭐’로 바뀌며 뜻이 모아졌다. 커피가 준비되고 나는 임시 사회자가 되어 할머니께 첫 번째 발언 기회를 드렸다. 할머니께 할아버지와의 추억 하나를 얘기해주십사 했는데, 할머니는 각자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자..

흥미로운 학급 개인 발표 시간

수업 시간. “야, 남자들은 다 저렇게 생각해?” 학급 전원이 돌아가는 개인 발표 시간이었다. 오늘 발표하는 남자 아이는 나랑 별로 친하진 않았는데, 평소에 이반 저반 여자애들에게 껄덕대는 걸로 유명한 놈이었다. “굳이 얘기하자면 남자 중에서도 쟤의 특출 난 생각이라고 해두지 뭐.” 발표자가 준비한 스크린에는 땅 속에서 빠른 속도로 굴을 파며 길을 만들고 공간을 만드는 크고 시끄러운 건설 장비가 있었다. 땅을 헤집고 시끄럽게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여자들을 구하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저렴한 SF영화 같은 눈물 나는 스토리네. 아무튼, 너는 안 그렇단 얘기잖아? 하하”“뭐... 일단은.” 이 수업은 매주 학급 아이들이 다 돌아가면서 자기가 나름대로 상상해온 어떤 허구의 이야기를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