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성 미안함 가진 PD가 생각하는 방송 연출



 TV 프로그램을 연출했던 경험으로 글을 연재하고 있다. 그런데 처음 생각과 다르게 일종의 ‘반성문’을 쓰게 되는 기분이다. 알게 모르게 방송 때문에 도움 주신 분들의 마음을 다치게 한 일들이 많을뿐더러, 개인적인 성취의 부족과 시스템의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마음의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작업해온 ‘방송 연출’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을 적기 전에 먼저 찾아본 사전에는 연출을 ‘대본이나 현실(팩트)을 가시화하는 작업’(영상콘텐츠제작사전 참고)이라 정의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느낀 것들을 더해서 ‘방송 연출’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보고 싶다.


 「생각과 글의 내용, 느낌이나 분위기, 어떤 의도 등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존재하는 개념적인 것들을 영상과 소리에 기반하는 여러 기법을 활용하여 시청각 매체로 재구성하고 유의미한 내용으로 전달하는 일.」


 내 설명이 쉽게 와 닿지 않는다면 ‘시’라는 문학 장르를 떠올려 보면 좋겠다. 언어라는 체계는 뭔가 명료한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표현하기에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신기한 장치다. 현실의 시각화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연출의 필요성은 출발한다.


 어떤 사람이 평생을 함께 지낸 친구의 죽음을 맞이했다고 가정해보자. 절친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일반적인 슬픔 외에도, 망자와 겪었던 아주 사소하고 특별했던 경험, 매우 개인적인 감정들이 죽음 앞에서 소용돌이 칠 것이다. 그것을 간단한 서술형 문장이나 단어로 묘사하려면 한계를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가끔 ‘이건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특수한 감정을 대변하는 단어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때 시인이라면 어떻게 그 감정을 표현할까?


 사전에서는 시의 정의를 ‘생각을 간결한 언어로 표현한 글’이라 내리고 있다. 영상 연출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내가 생각하는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감정과 분위기, 혹은 깨달음에 대해서 ‘언어로 재구성하는 일’을 한다. 영상 연출가는 ‘시청각 매체로 재구성’한다고 앞서 말했던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시인은 익숙하고 보편적인 단어를 가지고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낸다. 내가 느낀 감정과 직접적으로 연관 없는 일상적인 단어의 연결, 비유와 상징,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의미의 충돌 등 여러 가지 기법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분위기를 창조하고 표현해 내고야 만다. 그것으로 소용돌이치는 내 감정을 발산하고, 최대한 전달하려 애쓰는 것이다. ‘산문’도 그런 과정을 담아낼 수 있겠지만 ‘시’라는 함축적인 장르는 운율과 함께 그 독자적인 느낌이 강렬해지는 것 같다. (시라는 문학 장르에 전문가가 아니라서 내가 생각한 정도로만 적는 것을 알린다.)


 더 구체적인 상황을 들어볼까 한다. 만약 죽은 친구와 생전에 매일 저녁 7시마다 술 한 잔 기울이던 사이라고 해보자. 장례를 치른 친구의 ‘저녁 7시’는 이제 ‘술자리 앞의 외로움’ 일 수 있고, 7이라는 ‘숫자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 될 수도 있다. 술자리에서 겪었던 다양한 감정의 종말이다. 감정적인 것이 현실로 표현된다고 생각해보자. 어쩌면 친구가 즐겨먹던 술안주를 절반도 채 먹지 못하는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 덩그러니 남아있는 오징어 반 마리가 내 반쪽 같던 친구로 상징될 수 있다. ‘질긴 다리 질겅질겅 씹으며 삶을 욕하던 네 요란한 턱. 마른오징어 몸뚱이 둘로 찢어내도 비명 하나 돌아오지 않네.’ 어쩌면 안주의 냄새를 맡아보거나 오징어를 힘없이 씹어보는 행위. 혹은 다른 장소에서 느끼는 후각, 미각, 촉각적인 연상들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낼 수 있다. 단순하게 눈물 흘리는 몇 컷을 나열하는 것은 팩트를 전달하는 것 그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런 밑바탕 위에 개인적이고 극적인 상황이 추가되면, 일반적으로 담길 수 없는 깊이 있는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시와 영상 연출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출발은 대본이 될 수도, 특정한 주제 혹은 감정이나 깨달음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결국에는 개념적인 것을 시청각 기법으로, 시처럼 재구성하는 과정인 셈이다. 표현의 길은 무한하고 선택은 연출자에 달렸다.


 언어는 오랜 시간을 두고 발전해왔는데, 영상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영상이 주는 시각적 매력과 힘이 상당해서 많은 선구자들에 의해 다양한 실험이 시도되었다. 언어나 미술의 역사처럼 현재의 여러 가지 정형화된 영상 기법들이 끊임없이 발견 혹은 고안되었다. 때로는 형식 파괴라는 새로움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컷과 컷은 문학의 단어와 닮아서 독자적으로 의미가 있으면서도, 연결되는 방식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거나 충돌하기도 한다. 색상, 화면 구성, 컷의 순서와 시간의 왜곡 등 나열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요소들이 시각적인 요소로 활용될 수 있다. 소리의 연출도 다양한데, 시청각 기술만 사용하면서도 나머지 후각, 미각, 촉각을 연상하게 만드는 공감각적 연출이 가능하다. 시인들도 언어를 가지고 다채로운 표현을 하듯이, 영상 연출도 비슷하다. 연출 기법을 ‘영상언어’ 혹은 ‘영상문법’이라 말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방송 연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일종의 반성문을 쓰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매우 개인적이다. 하나는 위에 쓴 것과 같은 ‘연출에 대한 개념’을 나만의 기준으로 정리하지 못했을 당시, 그 주제와 감정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미안함이다. 제대로 담지 못했으니 무언가 어긋나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렴풋이 연출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갈 무렵, 확실하다고 믿었던 몇 가지 방법에 집착한 나머지 나와 출연자, 동료들을 불필요할 정도로 피곤하게 만든 것에 대한 미안함이다.


 어쭙잖은 연출을 한답시고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녔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때로는 가짜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상한 편집을 진심이었다고 믿었다. 현장과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 깨닫고 나아지기는 했지만, 방송 연출이라는 것에 정답이 없듯이 멀게 느껴지고 어려운 일이었다. 무식해서 용감했다.


 현장 인터뷰 중 ‘손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시청자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주문을 여러 가지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품절이어서 이웃 가게에 급히 달려간다. 필요한 물건을 꾸어다 구색을 맞추며 숨을 헐떡이는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줘야, 그 ‘열심히’라는 진심을 제삼자인 시청자에게 일부 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예전의 나는 현장에서 그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 까지는 그 진심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나마 알아낸 이런 표현 방식 몇 가지에 치중하는 바람에 강박적으로 카메라를 놓을 수 없었고, 동료와 출연자를 힘들게 만들었다. 촬영 시간은 늘 부족했다. 나중에는 출연자에게 이런 말로 연출의 필요성을 설득한 적도 있었다.


 “평소에 이런 손님이 오시면 이렇게 응대하신다고 하셨죠? 그런데 제가 촬영하는 동안 그런 유형의 손님이 오지 않고 계시니 비슷한 상황을 재연해본다고 생각해주시면 어떨까요?”


 ‘이건 거짓이 아니다’라고 설득하는 내 모습을 출연자는 이해했고, 결과물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방송이 탈 없이 나갔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불편함이 남아있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기는 민망해서 이 정도만 적는다. 연출은 결국 카메라를 조작하고 편집으로 덜어내면서 보여주고 싶은 장면만 나열하는 작업이다. 예시로 든 상황은 상급자나 가상의 시청자(혹은 모니터 요원?) 입맛에 맞는 것만 보여주겠다는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어떤 연출을 하게 되든 그 속에서 출연자와 주제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과거 독일의 정치 선동에 영상물이 적극 활용된 사례를 보면 미디어의 힘은 아주 강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은 그 효과가 다양한 플랫폼 때문에 분산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하다. 영화 ‘어벤져스’에서 비뚤어진 정의를 가진 악당 ‘타노스’는 막강한 힘을 가진 스톤에 집착한다. 스톤의 힘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다. 연출의 개념을 알고 이를 악용하고자 마음먹으면, 티 나지 않을 만큼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거짓말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반대로, 완성도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누구도 상처 받지 않는 진심이 담긴 영상을 만들 수도 있다. 핑거 스냅을 하는 자(연출자)의 마음에 달려있다. 유난이라 생각되더라도 좀 크게 떨어줄 필요가 있다.


 때로는 반대로 일반인 출연자가 방송 출연이 주는 부수적인 것들에 눈이 멀어 거짓말하는 경우도 있다. 15분 내외의 짧은 프로그램의 경우 비교적 촬영 기간이 짧아 통할지 모르겠지만 일주일 이상 부대끼며 촬영하는 휴먼 다큐멘터리의 경우, 연출자(PD)에게 속내를 숨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경우는 촬영을 취소할 수 없는 한 프로그램 분위기에 어긋나지 않도록 출연자를 포장하는 연출을 해야 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괴로워하는 동료를 본 적이 있다.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촉박한 시간 속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란 어려운 법이다. 결국 내 잘못이다. 그렇게 핑계를 대고 싶다.


 연출 측면에서 미안한 일에 대해 썼지만, 그 외적인 부분에서도 미안한 일들이 많다. 경력이 쌓이고 많은 사람을 겪으면서, 섭외 단계에서 나와 무언가 통하거나 성향이 비슷한 출연자를 선택하려는 고집도 잦아졌다. 어쩌면 선택이 아니라 골라내는 일이라고 할 만큼, 사람을 하나의 ‘아이템(항목, 물품)’으로 여기는 시각이 생겼다. 이외에도 정신없다는 핑계로 좀 더 세심하게 대하지 못한 것.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출연시킨 것. 반대로 방송에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편집시켜버린 것, 매우 적거나 없는 출연료 등 여러 이유로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 여기저기 민폐를 뿌리고 다닌 게 8할, 제대로 챙긴 사람은 2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미안함이 많은 사람이다. 회사에서도 죄송하다는 말 좀 그만 하라는 얘길 듣곤 했다. 습관이 되어버린 사과를 버리고 싶었는지 이제는 TV가 아니라 좀 더 자유로운 매체에서 이것저것 영상 제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한 영상 연출과 시의 표현 기법은 방송이 아닌 예술 영화에서나 사용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상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 원리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형화되지 않은 무언가를 각자의 분야인 언어와 영상 기법으로 표현하는 일은 닮았다. 어쩌면 무형의 것을 유형으로 표현하는 직업의 경우 대체로 비슷하지 않나 싶다. 이런 생각을 통해서 내가 글을 쓰고 영상을 편집하는 일에 ‘기준이 되는 무언가’가 생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연출은 가짜야’라며 방송에 부정적 시각을 가진 분을 종종 만난다. 내가 만든 방송도 그랬을까? 미안함을 적은 글이지만, 고마운 분들이 더 많았다. 진심 어린 실제 상황을 포착하고 방송으로 완성했을 때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다 떠나서, 그동안 제작했던 방송은 내 개인적 경험과 생각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낯선 일반인의 것을 어느 정도의 울타리 안에서 관찰하고, 정리하고, 해석하는 것에 그친 연출이었다. 목표와 주관이 없고 그저 방송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마음이 컸으니, 주변 사람에 휘둘리고 미안한 상황이 생겼다. 방송이 나간 후 출연자에게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을지라도, 나만 아는 불편한 장면을 볼 때마다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당시엔 몰랐지만 그 집단에서 조금 멀어져 보니 그렇다. 방송 연출은 내가 적은 글로 다 정의될 수 없다. 다양한 장르와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나름대로 연출 개념을 정리해본 셈이다. 매번 글을 쓰면서 생각이 추가된다. 이제는 영상 작업뿐만 아니라 글도 쓰면서 내 생각과 창의력에 집중하고, 좀 더 자유롭고 깊은 시도들을 해보려고 한다. TV 방송이 아닌 크고 작은 플랫폼에서 다양한 영상이 많이 생산된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다.



BGM♪ Stephane Pompougnac ‘Whatever’

사진. 글 ⓒcomposition83(CP83, CPBE)

Posted by CP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