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와 대화하던 중에 내가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 우리가 돈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것들에 대해서 초연해지는 혹은 그런 가르침을 다 받게 된 이후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금전적인 것들을 많이 허락하실 것이라는 그런 얘기였다. 나는 돈(물질)이라는 것이 주는 악한 기운에 대해서 어떻게 멀어질 수 있을지 관심이 많았지만 맹목적인 절제라는 것 외의 방법 따위를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단지 지금의 나는 영적인 초심자로서 여러가지 방면에서 나를 하나님께서 교육시키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재도 그렇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에 띈 기독교 서적이 있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 책 제목은 '돈, 섹스, 권력(리처드 포스터, 두란노)' 이었다. 저자는 주는 행위가 물질의 구속을 깨는 방법이라고 소개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특히 돈의 밝은면과 어두운 면, 돈을 향한 단순성의 가치에 대해 얘기하면서, 성경이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얘기하는 돈의 이중성을 면밀히 탐구하고 있다.
적고 싶은 내용이 많지만 아직 읽어가는 중이기도 해서, 앞서 말한 부분과 함께 개인적으로 연관지어 느꼈던, 오늘의 흥미로웠던 부분을 발췌해 적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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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단순한 삶에의 서약 中 어린이와 돈 (발췌)>
100~101p
우리는 돈이란 존경할 것도 경멸할 것도 아니라는 점을 말과 행동으로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돈에 경의를 표할 의무도 없으며 그렇다고 돈을 천시하는 것도 아니다. 돈은 유용하며 필수적이기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경이나 동경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돈을 섬기지 않고 이용하는 법을 알려 주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예컨대, 눅16:9, 마6:24)
이러한 차이를 구별하도록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어른들 자신도 이를 구별하는 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무척 어렵다. 우리들은 지금 개인의 삶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훈련하는 것을 거의 이해할 수 없게 됨으로써 강박관념 아니면 금욕주의만이 현대 정신의 유일한 덕목으로 남게 된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 능력 밖에 있는 것을 거절하든지 아니면 무조건 시인하고 수용하든지 한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 정치, 심지어는 경제에 있어서 독단주의가 그렇게도 편만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99p
언제인가 슈바이처가 지적했듯이, "어린이를 가르치는 데는 단 3가지의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첫째도 모범이요, 둘째도 모범이요 세째도 모범이다."
101p
우리들이 아이들에게 전생애를 통하여 남용 없는 선용(use without abuse)을 가르쳐 줄 의무를 지니게끔 된 것은 다름아닌 바로 이 점 때문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몸소 실천함으로써,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하나 보았으면 이제 끌 줄도 알아야 하며,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은 먹고 아니면 먹지 않으며, 좋은 음악을 즐기는가 하면 침묵을 경험할 줄도 알도록 본을 보여야 한다.
아이들이 우리들로부터, 일단 인간의 욕심을 넘어서는 절제를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게 되면, 이제야 비로소 돈이 주인이 아니요 종일 따름이라는 관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 단계, 바로 시작에 불과하다. 그들에게는 배워야 할 것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
102p
돈은 존경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정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일단 패퇴하여 그리스도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 돈은 섬김을 받지 않고 이제는 사용되는 것이다.
돈의 부정적인 측면은 필연적으로 탐욕을 지향하며 탐욕은 복수와 폭력을 낳는다. 반대로 긍정적인 면은 결국 관용으로 인도하며, 관용은 아량과 평화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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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는 이것이 시작이며 영적인 돈의 세력을 극복하는 체험을 어떻게, 주어진 질문에 답을 주며 돕도록 하는데 대한 내용들이 이어진다.
세상 사람들도 미니멀 라이프 같은 극단적인 절제를 통해서 물질로 부터 해방되고 싶어한다. 물질이 주는 영적인 악함을 왠지 모르게 감지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려고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하는 사람이 많다. 왜냐면 우리는 물질의 세상 속에 담겨 살고 있기 때문이며, 내 주변에 펼쳐진 물질의 가치를 넘어서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 속의 무엇(애착)을 버리려면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하지만 다른 더 크고 좋은 가치를 그 자리에 채워넣는다면 버려낼 수 있다. 사람이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렇다.
아무튼, 이 부분에서 가려운 부분이 긁혀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이유는 1 아니면 0 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문화를 내가 싫어해 왔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그런 일들이 종종 있곤 했는데 무언가를 선택하는 질문을 하고 자신과 같거나 다르다는 것을 구분짓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와중에 돈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나 스스로 절제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방어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뭔가 답답함을 느꼈는데, 저자의 설명이 여러장에 걸쳐 읽혀짐으로 인해서 생각의 변화가 생겼다. 이전까지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같은 극단적 절제에 공감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재밌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삶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그런 척 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잘 모르지만 일단 남 앞에서 어떤 확실한 선택을 해서 보여야 하는 일이 많다. 나 역시 그런 척 해왔던 모습이 달라지는 지점을 맞이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예전에 블로그에 써서 개인적으로 묶은 책에 '생각이 바뀌는 건 시간문제'라는 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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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더 할 말 있어?"
"네가 그러는 거 보니까 얼마 전 읽은 뉴스가 생각나서. 어른들 대부분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수시로 변하는 자기 생각을 감춘다고 하더란 말이지. 마음은 그게 아닌데 처음 주장을 굽힐 수가 없다는 거야. 아, 너 때문에 노래 끊겼잖아."
"다시 틀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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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생각난 이 글을 다시 읽어보니, 그 때는 극과 극으로 생각되는 어떤것이 더 큰 가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돈이라는 개념에 대한 양극단적인 신념도 더 큰 신념 앞에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오랜 시간을 두고 느낌으로 느껴온 것들을 이렇게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봐야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쓴 저자의 깊은 사유가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세상에서 떨어져 살 수는 없음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나는 극단적으로 돈이든 무엇이든 내가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초연해지기를 소망한 적이 있었다. 사도 바울이 부와 가난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그 말이 멋져보여서 였을까. 그런데 그가 말한 일체의 비결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본질적인 가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조금, 그 원리에 대해서 새삼 접목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참 신기하다. 내가 궁금해 하고 오랜시간 해결되지 않을 것 같던 질문들이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온다.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때, 적절한 양으로 가르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
오늘도 신뢰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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