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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입봉 후 직면한 ‘결정 장애’ (창의적인 명확함이 필요한 직업)

프로듀서(PD)와 연출자 본연의 역할은 별개이지만 보통의 방송 PD는 그것을 겸한다. 프로듀서로서 기획 및 제작 총괄, 연출자로서 무형의 결과물을 유의미한 그림으로 실체화시키는 작업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 외주 프로덕션의 PD였던 나였기에 그 의미를 섞어서 사용한다는 것을 적어둔다. 조연출 시절을 보내고 PD로 입봉 하게 된 후, 가장 먼저 직면했던 것은 ‘결정의 어려움’이었다. 연출의 방향이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았고, 다양한 과정에 익숙지 않아 생기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흔히 말하는 결정 장애의 순간을 자주 맞닥뜨려야 했다. 그 당시, 한 번은 나이 지긋하신 카메라 감독님과 촬영을 간 적이 있었다. 음식과 풍경을 담는 촬영이었는데, 필요한 컷들의 사이즈, 앵글, 움직임에 대해 자신감 있게 설명드리지 못..

맨발로 도시를 걷는 방법 (문득 눈이 떠진 새벽의 충동)

♪ 아이유 ‘사랑이 잘’ (feat. 오혁) (창작 글입니다.) 나는 요즘 이상하게 새벽이면 말똥말똥 눈이 떠져서 30분 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잠들곤 한다. 그날은 비 오는 밤이었다. 깨지 않았으면 비 오는 줄도 몰랐을 정도의 세차지 않은 비였다. 문득 맨발로 비 오는 거리를 걷고 싶어 졌다. ‘미쳤나?’ 새벽에 눈이 떠졌을 때는 꿈을 꾸다가 깨어나는 경우가 많았고, 뭔가 평소에는 생각지 못했던 단어의 조합들이 무작위로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나조차도 미쳤다고 느낄 법한 생각. 맨발로 밖에 나가보고 싶다니? ‘뭐 맨발로 밖에 나가는 게 불법은 아니잖아?’ 잠옷 대신 가벼운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습관적으로 신으려던 양말과 신발을 제쳐두었다. 현관 거울 앞에서 어둠 속의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우산..

계곡의 흙냄새 (기다 씨의 상담 일지 #2)

♪ Family of the Year 'Hold Me Down' “계곡에 가면 나는 흙냄새요. 고운 흙은 아니고 작은 자갈과 낙엽이 삭아서 섞인 거예요. 맑은 계곡물에 씻기면서 깨끗하고 상쾌한 냄새가 나요.” “구체적이네요.” “제가 여행을 많이 안 다녀봐서 본 것도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향기를 꼽으라면 그 냄새예요.” “흙냄새가 좋기는 하지만 낙엽 썩은 냄새가 상쾌하다니 좀 의외네요?” “습기가 고여서 꿉꿉한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말한 장소는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니까 상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표현하기 힘든데 아마 그 장소에 같이 가보시면 아실 거예요.” “제가 등산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럴지도.” “흙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은 저 말고도 많지 않나요? 비 올 때 나..

아침 수영과 타임 루프

나름 부지런한 인간이 되어보자며 시작했던 ‘아침 수영’. 일곱 시에 시작하는 체조에 맞추려면 보통 여섯 시 조금 넘는 시각에 일어나야 한다. 지금은 수영하지 않는다는 어떤 선배가 말했다. 여러 운동을 해봤지만, 특히 준비와 정리가 번거로운 운동이 수영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침 수영을 다닌다. 학창 시절이나 군 생활의 내 모습에 즐거운 운동은 없다. 그래. 나는 운동에 재능이 없구나. 또래 집단은 평범하게 즐기는 활동일 뿐인데, 감각과 실력이 없으니 재미도 없었다. 그런데 수영을 배우고 생각이 달라졌다. 물속에서는 몸이 가볍고 자세가 곧아졌다. 수영을 마치고 나오는 길은 폐가 열린 듯 상쾌했다. 강습이 힘들어 헐떡대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런 게 ‘러너스 하이’ 아닐까 싶은 활기찬 기분을 느껴보기..

그 자리에 남아있는 음악

“여기에 성함하고 연락처 적어주시면 돼요.” “네. 번호 적고... 이름을...” “기다 씨?” “네?” “와. 이름 멋지네요. 이기다 씨” “네. 좀 그렇죠?” “죄송해요. 처음 보는 이름이라. 왠지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데요?” “등록비는 카드로 결제할게요.” “네. 그런데 어쩌다 장구 배울 생각을 하게 되셨어요? 요즘은 수강생도 별로 없어서 말이죠.” “그게... 저는 뭔가 즉흥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개인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없어서 고민이었거든요. 회사 회식이나 뭐 그럴 때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예전부터 악기 하나는 꼭 다뤄보고 싶었는데 건반이나 복잡한 악기는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아-” “그리고 예전에 라디오를 많이 듣던 때가 있었는데, 우연히 틀게 된 국악 방송을 한참 들었..

부끄러움의 방문

‘띵 – 동’ “누구세요?” ‘철 – 컥’ “안녕하세요. 저는 ‘부끄러움’이라고 합니다.” “네? 뭐요?” “최근에 부끄러운 일 하신 적 있으시죠? 그것 때문에 방문했습니다.” “아니... 무슨 단체에서 오신 거 같은데, 뭐 촬영하세요?” “댁이 유명인이라도 되는 줄 아세요? 지금 장난하는 게 아닙니다.” “아니, 뜬금없이 부끄러운 일 했냐고 물으니 황당하잖아요? 아니다. 관심 없으니까 돌아가 주세요. 그럼...” “황당? 다른 얘기 해드릴까요? 혼자 잘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케케묵은 것들을 기어코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애꿎은 사람들 얼굴에 뿌렸단 말입니다. 그게 더 황당하지 않나요? 누구냐고요? 당신이죠. 직접 경고해주러 온 저를 무시하고 들어가려 하시네요?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나요?” “아니 뭐 ..

나도 모르게 살아온 '트렌디 라이프'

사람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시기가 있다. 나 역시도 내가 그런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돌이켜보니 내가 얼마나 평범하고 내세울 것 없는가 하고 깨닫는 순간이 왔다. 그게 아마 스무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자존감이 낮은 20대 중반을 보내고, 방송일을 하다가 늦게 간 학교에서 교수님들과 대화를 하며 내 삶을 돌아보고 자존감을 많이 회복하는 시기를 보냈다. 자존감을 회복하는 키워드는 내게 있어서 나 자신의 선택을 믿고 추진하는 것이었다.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많이 듣던 나였는데, 그것은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믿음, 행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저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내가 하는 일에 자신감이 붙고, 평범한 삶 속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가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