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서 멀리 이사를 가시게 됐다. 그래서 집에서 나온 오래된 가구나 가전을 버리게 되었다. 특히 냉장고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는데, 다행히 인터넷 검색을 해보시고 폐가전 수거가 있다며 신청을 하셨다. 문제는 신청 접수가 너무 많아서 지금 접수를 해도, 열흘 정도 지나야 가져갈 수 있다는 거였다. 일단 아버지는 접수를 하셨다.
동네가 구역별로 마치 땅따먹기를 하듯 재개발이 속속 되고 있는 곳이다. 언덕만 아니었지 달동네 같은 그런 곳이다. 주변에서 이렇게 전신주가 복잡하고 오래되어 하수구 냄새가 나며 낡고 월세가 싼 곳은 없을 것이다. 멀리 가면 또 이런 곳이 있겠지만. 그래도 동네에 이상한 사람, 좋은 이웃 다 함께 얽혀 살고 있는 사람 냄새 나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냉장고가 화근이었나? 이사 막바지에 냉장고를 집 앞 골목 전신주 아래에 가져다 놓자, 그 옆가게에서 담배를 피러 잠깐 나온 듯 한 젊은 남자 둘과 아버지가 시비가 붙었다. 거기 그걸 왜 놓느냐는 핀잔이었다. 아버지는 원래 무뚝뚝하고 목소리가 큰 편이라 남들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오해를 사기 쉬웠다.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젊은 남자들과 시비가 붙어버린 것이다.
결국 아버지를 보내고 내가 남아서 그 사람들 얘기를 들었다. 알고 보니 가게에 CCTV가 설치되어 있는데 저런 걸 버려놓고 가면 나중에 구청 같은 곳에서 CCTV를 보여달라고 귀찮게 요청하는 일이 많더라는 거였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정중하게 언제 수거하기로 했고, 내가 그 전에 빨리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최대한 알아보겠노라고 타이르고 돌려보냈다.
문제는 그 때 부터 시작이었다. 아버지께서 알아보신 것은 시에서 운영하는 폐가전 무상수거 사업으로 신청이 많이 밀려서 다음주 금요일이나 되어야 가져간다는 거였다. 최대한 빨리 가져갈 분이 없으려나. 그래도 고물이지만 분해하면 돈이 되는 거 아닐까? 싶었다.
인터넷을 뒤져서 폐가전 수거 아저씨께 전화를 드렸다. 가져갈 수는 있는데 냉장고 사진을 봐야겠다고 했다. 나는 사진을 찍어보냈다. 위의 저 사진이었다. 아저씨는 사진을 보고 전화를 걸어주셨는데, 답은 못 가져간다는 거였다. 자기 말고 다른 고물상이라도 저건 너무 오래된 모델이라 가져가지 않을거라고 했다. 오래 쓰긴 했는 모양이었다. 가져가도 다시 재생하거나 필요한 부품을 쓸 수 없는 모양. 아니면 다시 고쳐서 팔 수도 없는 그런 오래된 모델이라는 얘기였다.
알겠노라고 고맙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이렇게 된 거 미안하다고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결국 시에서 다음 주 금요일에 가져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전달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까 그 돌려보낸 두 남자가 들어간 옆 사무실로 가보았다. 그 남자들은 없었고, 대신 다른 남직원이 있었다. 그 분을 만나서 이런저런 상황이다 라고 얘기했다. 그렇게 설명했더니 알았다고. 근데 어차피 우리 가게 옆이라 CCTV가 비치는 곳도 아니고 상관 없을거라고 했다. 이 사람이 정상이었나. 아까 그 사람들이 예민했던건가. 아무튼 큰 탈이 없을 듯 했다. 냉장고에는 수거팀의 전화번호와 내 번호도 혹시 몰라서 적어두었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남자가 한 마디 덧붙였다.
여기 옆집에서 차고를 쓰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희는 괜찮은데 이집이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맞았다. 전봇대 옆에는 단독주택이 있었는데 차고 문에 조금 걸쳐있었다. 쌓여있는 먼지로 봐서는 차고를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모르니 얘기해보겠노라 하고 인사하고 남자를 돌려보냈다.
초인종을 눌렀다. 아주머니가 인사를 한다. 아침 일찍부터 이삿짐을 싣느라 소리를 내서 그랬는지 뒷집 이사가신 분들이죠? 하고 이미 알고 계셨다. 네. 이사를 했는데 냉장고를 앞에 두고 가게 되어서 말씀좀 드리려고 왔습니다. 하고 이야기 했다. 잠시후 아주머니가 나오셨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아무래도 냉장고가 오래되어서 수거하려면 오래 걸릴거 같다고. 아주머니는 차고는 지금 쓰지 않으니 괜찮다고 하시면서, 어쩔 수 없죠 하고 이해해 주셨다. 다행이었다.
아무튼 상황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고, 지금 글을 쓰는 시점에 이미 냉장고는 수거가 되었다. 정확히 그 날짜에 가져갔다. 냉장고가 사라지기 전 까지 혹시나 하고 신경이 좀 쓰였는데 결국 냉장고는 사람들이 이해해주었고 사라졌다. 누군가 가져갈까 재보았는지 슬쩍 놓여있는 모양이 바뀌기도 했지만 결국 가져간건 시에서 운영하는 무상수거팀이었다. 정말 고물상도 쓸모가 없는 폐가전이었는 모양이다.
부모님이 이사를 하고 이제 이 동네에 내가 남았다. 일이 잘 풀린다면 나도 좋은 동네로 이사를 할 수 있을테지. 이런 글을 남기면서 생각해본다.
냉장고는 멀쩡하게 작동했지만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새로운 기종을 원한다. 나는 여전히 그리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현실에서,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걸 증명할 만한 무언가가 내겐 필요하다.
얼마 전 만났던 선배 한 명이. 너는 여러가지 아이디어는 많고 좋은데 뭔가 한 방 크게 걸어서 도전해봐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그 말이 맞다고 했다. 나 스스로도 느끼고 있던 지점이었다. 콘텐츠를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그럴듯한 내 브랜드는 없다. 남에게 의뢰 받은 일은 잘 처리하면서도 내 스스로 무언가를 기획하는 것에는 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이제는 시간이 얼마 없다. 이 달동네 같은 곳이 전부 재개발 되기 전에 내가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 냉장고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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