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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혀온 아이들

"애한테 얘기했죠. 도저히 안 되겠으면 거부하고 여기서 시간을 벌자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위한 수용소가 있습니까?" 학생 A가 일어났다. 관찰 선생은 그의 행동을 기록했다. 호텔 방에는 지난밤, 골목 구석에 숨어서 작은 일탈을 하던 아이 여럿이 잡혀와 있었다. 지금 이 방에는 상관없는 또래 아이들과 그의 엄마로 여겨지는 사람도 보였다. 그저 교복 입은 학생들이 단체 여행 왔다고 여길법한 모습이었다. "아이 성적 때문이에요. 일부러 잡혀와서 시간을 끌려고 일탈 학생인 척하기도 하죠. 편법이긴 하지만..." 한 여성이 말했다. "저는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아요. 예전처럼 최루탄도 화염병도 없는 시대잖아요. 하지만 저는 그런 저항을 떠올리면서 일종의 안전함 속의 작은 거부를 표시하는 거예요. 이런 레지..

나를 바보로 만드는 사람 인식하기

만나기 싫은 유형의 사람이 있다. 아직까지는 이런 유형의 사람이 내 주변에 아주 가끔 있다는 것을 ‘인식’만 겨우 한 상태라서 그 사람과 상황에 휘둘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나중에 내가 더 성숙해진다면 그 어떤 파도라도 부드럽게 품는 해변 같은 사람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에 미치지 못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왔고 살아갈 테지만, 유독 나의 마음을 괴롭힌 사람의 유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막상 적으려니 까다롭긴 한데 굳이 정리한다면…. 「이 사람은 나에게 특정한 감정이나 생각을 느끼도록 지속적으로 행동(부추김)한다. 그런데 정작 쌓여온 감정(긍정, 부정)을 그 사람에게 털어놓았을 때 ‘내가 언제? 난 그런 적 없는데?’라고 반응한다. 잡아떼는 느낌 이상의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

무색무취한 사람의 고통(?)과 즐거움

무색무취한 사람의 고통(?)과 즐거움(발견의 기회를 가진 당신은 즐거울 예정인 사람) SNS에서 보게 된(추천된) 여러 사람의 글, 만화 중에, 자기 자신의 취향 없음 또는 자기 확신 없음에 대해 아쉬워하는 내용이 눈에 띄는 요즘이다. 나 또는 누군가는 당장 내 주변을 둘러봤을 때 나만의 취향이 엿보이는 특징적인 물건이나 옷도 없고, 자주 가는 멋진 카페나 미술관도 없으며, 남에게 추천해줄 맛집도 알지 못한다. 좋아하는 작가나 글귀를 외지도 못하고 그저 밋밋하게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고 여겨진다. 단지 무엇을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에도 우물쭈물하고, 다들 좋다길래 가봤더니 별 것 없어서 실망만 남기도 하고, 거침없이 대화를 이끄는 사람에 주눅 들어 고개만 끄덕이다 돌아오고, 남에게 나는 줏대 없는 사람으로 보..

같은 것을 보는데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

어떤 속물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느낄 때, 내가 그것보다 더 큰 가치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아직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어렴풋이 동경하고 있는 그런 사람, 흔들리지 않는 주춧돌 위에 서 있는 초연한 사람이 되고 싶은 데 갈 길이 멀다. 언젠가 읽었던 소설 모모의 주인공처럼 한 발짝 앞만 바라보면서 계속 청소해 나갈 뿐이다. 지금의 나는, 내가 단 한 번의 벼락을 맞아 달라지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인생의 드라마틱한 체험이 없는 대신, 조금씩 변화되는 나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아주 약하게 주어졌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새해가 되면 나만의 테마가 될 수 있는 글귀나 문장을 책상 근처에 붙여두고 있다. 작년에는 '몰입', '내게 필요한 것은 이미 내 주변에 있다.' 이런 말..

그 토끼들이 살던 세상

“뭐야? 선물이라도 사 온 거야? 웬 쇼핑백 사이즈가 크다?” “선물? 생각 못한 걸 받은 건 맞는데...” “이리 줘 봐…. 이 지저분한 담요는 뭐냐? 토끼? 두 마리나? 너 다시 토끼 키우기로 한 거야? 근데 얘들은 이미 다 큰 거 같네?” “아니야.” “아니라고? 얘들 다 큰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내가 다시 키우는 게 아니라고. 전에 키우던 애들. 네가 봤던 토끼들이라고.” “뭐? 엄청 오래되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까 그동안 토끼 얘기가 전혀 없었네? 처음에 블로그에 사진도 올리고 그랬잖아? “그래. 나는 왜 처음에는 엄청 호들갑 떨다가 일을 망치는 걸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얘들은 누가 돌봐주고 있었는데?” “나 진짜 벌 받아야 돼. 그냥 우리 집 베란다에서 알아서 크고 있었..

‘부럽다’ 대신 ‘대단하다’로 고쳐 쓴 메시지

신학대학교 입학을 준비해오던 친구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 친구는 경험 삼아 입학시험을 본 상태였고, 아무래도 종교적인 도전이다 보니 옛 친구 중에는 나에게만 내용을 미리 알렸던 터였다. 벌써 몇 주 전 이야기다. 당시 나는 그의 기도 부탁을 받았고, 그렇게 열심히는 아니었지만 가끔 기도를 하며 그의 이름과 내용을 되뇌었다. 시험 당일에는 ‘파이팅’을 포함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의 메시지를 보는 순간 결과가 나왔구나 싶었다. 메시지에 따르면, 시험 결과를 기다리던 도중에서야 놓치고 있던 다른 절차를 알게 됐다고 한다. 이미 접수가 마감됐기 때문에 다음에 다시 도전하게 됐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어찌 됐든 이번 경험을 토대로 다음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응원해줘서 고맙노라 ..

‘눈물 편집’에 관한 부끄러운 고백 (때로는 시청률보다 출연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

내가 제작했던 프로그램 프롤로그 중에 ‘눈물’로 시작하는 것이 몇 개 있었다. 일반인 출연자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가장 극적인 인터뷰와 눈물 흘리는 장면을 연결시킨 것이었다. 한 시간짜리 영상의 시작으로 강렬한 첫 카드를 던지고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겠다는 생각이었다. 프롤로그는 해당 회차의 화두를 던지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로 만들어지지만, 요즘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프롤로그는 가장 흥미로운 장면을 나열하는 하이라이트 방식이 될 수도 있고, 모든 결론을 다 지어놓고 이유를 파보는 추리 영화의 첫 시퀀스가 될 수도 있다. 형식은 파괴되고 있고, 연출의 제약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와중에 첫 장면부터 눈물을 흘리는 일반인 시청자의 모습이란…. 이제 와 다시 보니, 그것만큼 부담스럽고 보기 민..

PD 입봉 후 직면한 ‘결정 장애’ (창의적인 명확함이 필요한 직업)

프로듀서(PD)와 연출자 본연의 역할은 별개이지만 보통의 방송 PD는 그것을 겸한다. 프로듀서로서 기획 및 제작 총괄, 연출자로서 무형의 결과물을 유의미한 그림으로 실체화시키는 작업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 외주 프로덕션의 PD였던 나였기에 그 의미를 섞어서 사용한다는 것을 적어둔다. 조연출 시절을 보내고 PD로 입봉 하게 된 후, 가장 먼저 직면했던 것은 ‘결정의 어려움’이었다. 연출의 방향이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았고, 다양한 과정에 익숙지 않아 생기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흔히 말하는 결정 장애의 순간을 자주 맞닥뜨려야 했다. 그 당시, 한 번은 나이 지긋하신 카메라 감독님과 촬영을 간 적이 있었다. 음식과 풍경을 담는 촬영이었는데, 필요한 컷들의 사이즈, 앵글, 움직임에 대해 자신감 있게 설명드리지 못..

위기 상황을 상상해보는 연습 (가상의 글쓰기 발표 수업)

위기 상황을 상상해보는 연습 (가상의 글쓰기 발표 수업) “다음 사람 나와서 발표해보자.” “네.” 교탁 앞에 서자 친구들이 작은 박수를 쳐주었다. 규태는 멋쩍은 듯 선생님과 잠깐 눈을 마주치고 프린트해 온 종이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심호흡을 한다. “저는 선생님께서 내주신 과제를 듣자마자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버스기사이십니다.” 규태가 아버지의 직업을 말하자 친구들의 분주한 눈들은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규태는 머리를 한 번 저으며 발표를 이어갔다. “원래 이번 발표 과제는 어떤 비상 상황이 발생할 것을 대비해서 가상의 시나리오를 작성해오는 것이었는데, 저는 너무 궁금해서 아버지께 실제로 버스에서 어떤 비상 상황을 겪으셨는지 여쭤봤습니다.” “반칙인데~.” 교실 구석에서 농담 섞인 말..

나이를 먹을수록 화를 참을 수가 없어요 (가득 차 버린 감정의 창고)

“나이를 먹으면서 화를 자주 내는 것 같아요.” “예전엔 어떠셨는데요?” “그게 말이죠. 화가 나도 그냥 참기만 했던 것 같아요. 딱히 하소연할 곳도 없었어요. 아무튼, 나이를 먹으면 너그러운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참기가 힘들어요.” “친구가 별로 없으신가요? 스트레스 푸는 방법 같은 건?” “별로. 남한테 제 얘기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밖에 어디 혼자 돌아다닐 데도 없고요.” “그럼 어렸을 때 친구들과는 뭘 하셨죠?” “학교도 못 마쳤는데 집안 형편이 좋질 않아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생각해보니까 다들 스쳐간 친구들인 것 같아요. 그러다가 이런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 그런 느낌으로 결혼했던 것 같아요. 가족과 떨어지려고요. 나중에 아이 낳아 기르면서 정 붙이고, 식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