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15

인터뷰 진행 중 경험한 이상 신체 증상 (내성적인 PD의 말 못 할 고충)

교양 프로그램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동료들에게 조차 말 못 한 고충 하나가 있었다. 제작 여건이 열악한 관계로 혼자 촬영을 나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카메라를 가슴에 붙여 들고 몇 발치 앞의 인터뷰이와 일대일로 이야기하는 동안 갑자기 몸이 굳어버리는 일이 생겼다. 주로 목 뒤로부터 시작하는 근육의 경직이었다. 이게 시작되면 인터뷰이와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눈을 마주치면 긴장이 목덜미 위아래로 퍼지면서 얼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때마다 카메라를 조금 높게 들어서, 액정화면 뒤로 내 얼굴을 숨겼다. 시선의 교류를 차단하려고 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증상이 완화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액정 화면 속의 사람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고, 그 간접적인 시선만으로도 몸의 긴..

큰 착각 (조용히 지내는 삶이 주는 오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한 지 몇 년이 지났다. 주로 혼자서 일하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면서 몇 년이 흘렀다. 그렇게 내 나름의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그런지, 조용히 몇 년을 보내면서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내 나름대로 너그럽고 온화한 성격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교회와 예배에 더 자주 참석할 수 있게 되었고, 나에게 주어지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작은 깨달음이 모이면서 조금씩 성숙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가끔 사람들을 만나 안부를 묻다 보면, 요즘의 내 삶에 대해 만족스럽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경제적으로는 회사 다닐 때만큼은 못 할지언정,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건 큰 착각..

아침 수영과 타임 루프

나름 부지런한 인간이 되어보자며 시작했던 ‘아침 수영’. 일곱 시에 시작하는 체조에 맞추려면 보통 여섯 시 조금 넘는 시각에 일어나야 한다. 지금은 수영하지 않는다는 어떤 선배가 말했다. 여러 운동을 해봤지만, 특히 준비와 정리가 번거로운 운동이 수영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침 수영을 다닌다. 학창 시절이나 군 생활의 내 모습에 즐거운 운동은 없다. 그래. 나는 운동에 재능이 없구나. 또래 집단은 평범하게 즐기는 활동일 뿐인데, 감각과 실력이 없으니 재미도 없었다. 그런데 수영을 배우고 생각이 달라졌다. 물속에서는 몸이 가볍고 자세가 곧아졌다. 수영을 마치고 나오는 길은 폐가 열린 듯 상쾌했다. 강습이 힘들어 헐떡대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런 게 ‘러너스 하이’ 아닐까 싶은 활기찬 기분을 느껴보기..

나도 모르게 살아온 '트렌디 라이프'

사람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시기가 있다. 나 역시도 내가 그런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돌이켜보니 내가 얼마나 평범하고 내세울 것 없는가 하고 깨닫는 순간이 왔다. 그게 아마 스무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자존감이 낮은 20대 중반을 보내고, 방송일을 하다가 늦게 간 학교에서 교수님들과 대화를 하며 내 삶을 돌아보고 자존감을 많이 회복하는 시기를 보냈다. 자존감을 회복하는 키워드는 내게 있어서 나 자신의 선택을 믿고 추진하는 것이었다.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많이 듣던 나였는데, 그것은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믿음, 행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저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내가 하는 일에 자신감이 붙고, 평범한 삶 속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가고 있..

골목에서 만난 야쿠르트 아주머니의 영업 기술

골목에서 만난 야쿠르트 아주머니. 문이 열려있는 단독주택 대문 앞에서, 마당을 청소중인 집주인에게 뭐라뭐라 하고 계신다. 김장철이 다가오는데 절임배추를 사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야쿠르트에서 배달 요리 판매를 해서 하는건지, 따로 영업 루트가 있으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집주인은 듣는둥 마는둥이다. 나는 요구르트 몇 개를 살 생각으로 카트 앞으로 다가갔다. 물건을 사겠다는 눈인사를 건네자 아주머니께서 집주인에 대한 영업을 접고 돌아온다. 나는 필요한 것 다섯개를 주문한다. 아주머니는 물건 담을 봉지를 꺼내면서 기왕이면 열 개를 사라고 권유한다. 나는 그렇게 많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아주머니는 한 번 더 열 개를 사라고 권유한다. 나는 다섯개만 달라고 다시 말한다. 아주머니는 더이상 말 없이 다섯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