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29

섭리적 우연

“너는 오페라나 뮤지컬, 클래식 공연 같은 거 보러 간 적 있어?” “회사에서 문화생활하라면서 단체로 보내고 그랬는데, 나는 취향이 아니라서 안 갔어. 근데 왜?” “요즘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는 주식도 모르고 골프나 스키 같은 것도 탈 줄 몰라. 카지노에 가본 적도 없고, 번지점프를 해본 적도 없지. 뭔가 내가 해보지 않은 것들 투성이라 내가 아는 세계보다 모르는 세계가 더 많은 기분이었어. 그런데, 내가 몇 년 전부터 큰 맘먹고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거든. 그리고 한참 재미를 느끼면서 하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나는 그동안 내가 운동 자체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수영은 왜 재밌는 걸까?” “수영이 맞았나 봐?” “응. 학교 다닐 때부터 축구나 농구, 족구, 심지어 탁구 같은 구기 종목은 ..

J의 새벽 연락

‘학창 시절 J는 참 똑똑했다.’ 그건 아마 내 기억 속에서 좀 더 부풀려졌는지도 모른다.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때의 나도 지금 같지 않았으니까. 성적이 상위권이었다 그런 게 아니다. 뭔가 하는 행동이 시원하고 유쾌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름 석 자를 들으니까 안개 물기처럼 남아있던 분위기가 떠오른다. ‘똑 부러졌었지. 아마?’ 그런 그녀가 내 앞에서 자기 인생을 한탄하고 있다. 나는 이런 기대를 하고 나온 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이런 그녀의 모습도 뭔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막연하게 더 대단하고 멋진 사람이 됐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집을 나서는 동안 내가 망상을 했나? 어찌 됐든 ‘낯선’이라기엔 가깝고, ‘지인’이라고 하기엔 타인에 가까운 친구를 그렇게 만났다. 느닷없이. 그리고 의외의 모습으..

살인자의 ‘용서받았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났다.

“살인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말을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할 수 있는 거죠? 그 얘기를 듣고 너무 어이없어서 화가 났어요.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고, 그게 그렇게 피해자와 가족들로부터 쉽게 용서받을 일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아…. 그건 말하기 쉬운 얘긴 아니지만….” “그 뻔뻔함에 대해서 인정하겠다는 건가요?” “당신이나 저, 그 가해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한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크고 작은 변화를 겪으며 이뤄온 생각과 그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는 말이었어요. 그 대답이 나오게 된 과정을 공유하고,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없이요.” “그렇겠죠. 하지만, 그 살인자를 저와 비슷하게 취급하진 말아..

잡혀온 아이들

"애한테 얘기했죠. 도저히 안 되겠으면 거부하고 여기서 시간을 벌자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위한 수용소가 있습니까?" 학생 A가 일어났다. 관찰 선생은 그의 행동을 기록했다. 호텔 방에는 지난밤, 골목 구석에 숨어서 작은 일탈을 하던 아이 여럿이 잡혀와 있었다. 지금 이 방에는 상관없는 또래 아이들과 그의 엄마로 여겨지는 사람도 보였다. 그저 교복 입은 학생들이 단체 여행 왔다고 여길법한 모습이었다. "아이 성적 때문이에요. 일부러 잡혀와서 시간을 끌려고 일탈 학생인 척하기도 하죠. 편법이긴 하지만..." 한 여성이 말했다. "저는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아요. 예전처럼 최루탄도 화염병도 없는 시대잖아요. 하지만 저는 그런 저항을 떠올리면서 일종의 안전함 속의 작은 거부를 표시하는 거예요. 이런 레지..

나를 바보로 만드는 사람 인식하기

만나기 싫은 유형의 사람이 있다. 아직까지는 이런 유형의 사람이 내 주변에 아주 가끔 있다는 것을 ‘인식’만 겨우 한 상태라서 그 사람과 상황에 휘둘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나중에 내가 더 성숙해진다면 그 어떤 파도라도 부드럽게 품는 해변 같은 사람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에 미치지 못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왔고 살아갈 테지만, 유독 나의 마음을 괴롭힌 사람의 유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막상 적으려니 까다롭긴 한데 굳이 정리한다면…. 「이 사람은 나에게 특정한 감정이나 생각을 느끼도록 지속적으로 행동(부추김)한다. 그런데 정작 쌓여온 감정(긍정, 부정)을 그 사람에게 털어놓았을 때 ‘내가 언제? 난 그런 적 없는데?’라고 반응한다. 잡아떼는 느낌 이상의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

그 토끼들이 살던 세상

“뭐야? 선물이라도 사 온 거야? 웬 쇼핑백 사이즈가 크다?” “선물? 생각 못한 걸 받은 건 맞는데...” “이리 줘 봐…. 이 지저분한 담요는 뭐냐? 토끼? 두 마리나? 너 다시 토끼 키우기로 한 거야? 근데 얘들은 이미 다 큰 거 같네?” “아니야.” “아니라고? 얘들 다 큰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내가 다시 키우는 게 아니라고. 전에 키우던 애들. 네가 봤던 토끼들이라고.” “뭐? 엄청 오래되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까 그동안 토끼 얘기가 전혀 없었네? 처음에 블로그에 사진도 올리고 그랬잖아? “그래. 나는 왜 처음에는 엄청 호들갑 떨다가 일을 망치는 걸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얘들은 누가 돌봐주고 있었는데?” “나 진짜 벌 받아야 돼. 그냥 우리 집 베란다에서 알아서 크고 있었..

‘부럽다’ 대신 ‘대단하다’로 고쳐 쓴 메시지

신학대학교 입학을 준비해오던 친구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 친구는 경험 삼아 입학시험을 본 상태였고, 아무래도 종교적인 도전이다 보니 옛 친구 중에는 나에게만 내용을 미리 알렸던 터였다. 벌써 몇 주 전 이야기다. 당시 나는 그의 기도 부탁을 받았고, 그렇게 열심히는 아니었지만 가끔 기도를 하며 그의 이름과 내용을 되뇌었다. 시험 당일에는 ‘파이팅’을 포함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의 메시지를 보는 순간 결과가 나왔구나 싶었다. 메시지에 따르면, 시험 결과를 기다리던 도중에서야 놓치고 있던 다른 절차를 알게 됐다고 한다. 이미 접수가 마감됐기 때문에 다음에 다시 도전하게 됐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어찌 됐든 이번 경험을 토대로 다음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응원해줘서 고맙노라 ..

내 주변에는 없다. 세상 어딘가에는 있다. (관심사에 대해 깊이 나눌 대화 상대)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끼는 어떤 자연스러운 사실들이 있다. 흔히 공감대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의 어떤 출연자가 무대 위를 돌아다니고 있다 해보자. A그룹에 갔더니 맛있는 △△에 대한 열띤 대화를 하고 있다. 따분함을 느끼고 B그룹으로 이동하자 멋있는 □□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C그룹에 갔더니 특정 ○○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주인공은 계속 A, B, C 그룹을 돌아다니며 대화에 껴보지만 실은 별로 중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적다 보니 따분한 구성의 무대인 것 같다. 공개 코미디 무대로 비유한 이유는 각각의 개인이 겪었을 비슷하지만 다른 경험을 익숙한 포맷으로 표현해보고, 공감할 수 있도록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위의 예시를 ..

나이를 먹을수록 화를 참을 수가 없어요 (가득 차 버린 감정의 창고)

“나이를 먹으면서 화를 자주 내는 것 같아요.” “예전엔 어떠셨는데요?” “그게 말이죠. 화가 나도 그냥 참기만 했던 것 같아요. 딱히 하소연할 곳도 없었어요. 아무튼, 나이를 먹으면 너그러운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참기가 힘들어요.” “친구가 별로 없으신가요? 스트레스 푸는 방법 같은 건?” “별로. 남한테 제 얘기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밖에 어디 혼자 돌아다닐 데도 없고요.” “그럼 어렸을 때 친구들과는 뭘 하셨죠?” “학교도 못 마쳤는데 집안 형편이 좋질 않아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생각해보니까 다들 스쳐간 친구들인 것 같아요. 그러다가 이런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 그런 느낌으로 결혼했던 것 같아요. 가족과 떨어지려고요. 나중에 아이 낳아 기르면서 정 붙이고, 식당이..

어린이날 단톡방에서 발견한 내 모습 (30대의 성장이라는 것)

어린이날 저녁. 친구들이 만들어 놓은 단톡방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아빠들 다 고생 많았다는 내용이었다. 결혼해서 자녀가 있는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이야기 주제였다. 서로 자녀들의 안부를 묻고, 어린이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몇 명의 싱글 친구들에겐 해당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아빠들은 고생했겠구나 한 마디 적어둔 뒤 조용히 있었다. 문득, 나는 친구들과 다르게 좀 더딘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군대를 다녀와서 방송 일을 시작한 뒤,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대학에 다녀왔다. 30대 중반인 친구들은 지금 육아에 빠져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자녀가 주는 기쁨과 피로함이 담긴 일상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