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29

미인대회 폐지 말고 (방송의 매력 상품화에 관한 대화)

“왜 요즘엔 미인대회를 안 하는 걸까?” “글쎄. 성 상품화 그런 것 때문에 사라진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 근데 나 어렸을 때 내 주변 어른들이 미스코리아 나가보라고 했었거든. 얼마 전에 그 얘기가 갑자기 생각났는데, 가만 보니까 언제부턴가 미스코리아나 슈퍼모델 대회를 볼 수가 없더란 말이지.” “미스코리아? 으하하. 진심 아니지? 슈퍼모델 대회는 케이블에서 본 것 같은데 생각보다 인기가 없었던 듯?” “야! 지금은 뭐 보시다시피 이런 상태고…. 내가 어렸을 때, 엄마 졸라서 화장하고 찍은 사진도 어디 남아 있을걸? 그땐 진심이었다고. 아무튼, 노골적인 성 상품화는 눈살 찌푸려지는 거니까 사라져야 하는 게 맞겠지. 근데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냐? 이성에 대한 매력을 뽐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인간과 원자의 공통점 찾기 (갑자기 분위기 도넛?)

♪ Foster The People ‘Sit Next to Me’ (창작 글입니다.) “이거 공통점 찾기 앱이라는 건데, 지금처럼 뭔가 대화 주제가 없을 때 해보면 좋은 앱이래. 단어 몇 개가 무작위로 나오면 그걸 가지고 대화하는 거야. 한 번 해볼래?” “그래 해보지 뭐.” “단어가 여러 개 나올수록 공통점 찾기가 어려울 테니까 일단 두 개부터 시작해보자.” “알았어. 그런데 예전에도 해봤어?” “아니, 너랑 하는 게 처음이야.” “뭐야 그게.” “잠깐만. 앱 실행 중이야. 나름 여러 분야의 단어가 조합될 수 있도록 카테고리를 최근에 더 추가했대.” “엉뚱한 게 나와서 맘에 안 들면 다른 단어로 다시 섞을 수 있어?” “나오는 대로 그냥 해보자. 도망칠 생각 하지 말고.” “도망이라니.” “나왔다. 원..

계곡의 흙냄새 (기다 씨의 상담 일지 #2)

♪ Family of the Year 'Hold Me Down' “계곡에 가면 나는 흙냄새요. 고운 흙은 아니고 작은 자갈과 낙엽이 삭아서 섞인 거예요. 맑은 계곡물에 씻기면서 깨끗하고 상쾌한 냄새가 나요.” “구체적이네요.” “제가 여행을 많이 안 다녀봐서 본 것도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향기를 꼽으라면 그 냄새예요.” “흙냄새가 좋기는 하지만 낙엽 썩은 냄새가 상쾌하다니 좀 의외네요?” “습기가 고여서 꿉꿉한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말한 장소는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니까 상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표현하기 힘든데 아마 그 장소에 같이 가보시면 아실 거예요.” “제가 등산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럴지도.” “흙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은 저 말고도 많지 않나요? 비 올 때 나..

사마리아인

“굿모닝!” “그래. 상쾌한 아침... 이었으면 좋겠네.” “뭐야, 퀭한 눈은? 어제 밤샜냐? 게임?” “네가 재밌다 해서 ‘배드 사마리안(Bad Samaritan)’ 엔딩 보려고 달렸지. 근데 밤 안 새웠거든?” “그거 분기별로 선택하는 게 은근 압박이던데, 행동에 따라 스토리 진행이 엄청나게 달라지니까. 그래서 엔딩은 봤어?” “어... 그럴 뻔했는데, 이제 몸이 게임을 거부하기 시작했나 봐.” “무슨 소리야?” “뭔가 3D 화면이 울렁거리더니, 갑자기 엄청 메스껍더라고.” “뭐야. 멀미했냐?” “나는 그런 거 없는 줄 알았는데, 아무튼 머리가 엄청 아프더라고. 그래서 게임 끄고 바람 좀 쐴까 하고 집 앞 공원에 갔지.” “방구석 폐인의 모험 1장이 시작된 건가? 하하” “아무튼 공원에서 좀 웃긴 일..

그 자리에 남아있는 음악

“여기에 성함하고 연락처 적어주시면 돼요.” “네. 번호 적고... 이름을...” “기다 씨?” “네?” “와. 이름 멋지네요. 이기다 씨” “네. 좀 그렇죠?” “죄송해요. 처음 보는 이름이라. 왠지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데요?” “등록비는 카드로 결제할게요.” “네. 그런데 어쩌다 장구 배울 생각을 하게 되셨어요? 요즘은 수강생도 별로 없어서 말이죠.” “그게... 저는 뭔가 즉흥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개인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없어서 고민이었거든요. 회사 회식이나 뭐 그럴 때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예전부터 악기 하나는 꼭 다뤄보고 싶었는데 건반이나 복잡한 악기는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아-” “그리고 예전에 라디오를 많이 듣던 때가 있었는데, 우연히 틀게 된 국악 방송을 한참 들었..

의외의 선물

“자. 이거 선물이야.” “책이잖아? 뭐야. 성경이네?” “응. 너 교회 안 다니는 거 잘 알지만, 왠지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몇 권 샀는데 한 권은 네 거야.” “고맙긴 한데 갑자기 왜?” “그냥 좋은 책 선물이라고 생각해줘. 간지럽지만 소중한 사람들한테 주고 싶은 가치 있는 선물이랄까... 뭐 그랬어.”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야 좋지. 근데 어떤 부분이 좋았던 거야? 이거 두꺼워서 다 읽겠냐?” “너 영화 보는 거 좋아하지?” “당연하지.” “그냥 천천히 내 얘기 들어 봐. 영화를 많이 본 평론가들의 말을 빌리면...” “갑자기 왜? 꼼짝 못 하고 들어야겠네.” “하하. 영화 평론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인상 깊은 예술 영화는 작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이 있대. 절대적인..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사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사람 “선생님. 제가 여기 누워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나요. 꿈이나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아요. 그런데 천장이 좀 삭막하네요. 아 죄송해요. 아무 말이나 해보라고 하셔서...” “...” “아. 그런데 이제 뭘 얘기하죠?” “조금씩 어렸을 때로 가면서 얘기하고 있으니까, 이번엔 기억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을 얘기해보세요.”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면...” “보통 초등학교 입학 전의 기억을 한 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긴 해요. 기억이 나지 않으시면 그냥 어렸을 때 기억 아무거나 얘기하셔도 돼요.” “생각났어요. 나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병아리를 사 와서 베란다에서 기르신 적이 있었어요. 가끔 가족들이 모일 때면 거실에 풀어둔 채 놀곤 했는..

사막에서 찾은 바늘

“한국에도 사막이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설마” “관광객을 모으기 위한 포장이 조금 있긴 한데, 바다와 인접한 지형에 모래가 많이 쌓이는 곳이 있어. 사진 찍으면 사막의 거대한 사구 같아 보이는 그런 곳들 말야.” “진짜야?”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얼마 전에 여행 다녀오면서 그 해안 사구를 걸었는데, 재밌는 일이 있었어.” “야. 기대하게 하지 마. 별로 재미없는 거잖아. 다 알고 있다고.” “눈치 빠르네? 별건 아니고, 내가 그 작은 사막에서 걷는 동안 왼쪽 발이 불편한 거야. 그래서...” “신발에 모래라도 들어갔어?” “나도 그런 줄 알고 신발을 봤거든? 근데 밑창에 웬 바늘이 박혀있는 거야. 금속 핀 모양인데 조금 녹슬어 있긴 해도 끝은 부러져서 갈라진 게 영락없는 바늘이었어...

부끄러움의 방문

‘띵 – 동’ “누구세요?” ‘철 – 컥’ “안녕하세요. 저는 ‘부끄러움’이라고 합니다.” “네? 뭐요?” “최근에 부끄러운 일 하신 적 있으시죠? 그것 때문에 방문했습니다.” “아니... 무슨 단체에서 오신 거 같은데, 뭐 촬영하세요?” “댁이 유명인이라도 되는 줄 아세요? 지금 장난하는 게 아닙니다.” “아니, 뜬금없이 부끄러운 일 했냐고 물으니 황당하잖아요? 아니다. 관심 없으니까 돌아가 주세요. 그럼...” “황당? 다른 얘기 해드릴까요? 혼자 잘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케케묵은 것들을 기어코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애꿎은 사람들 얼굴에 뿌렸단 말입니다. 그게 더 황당하지 않나요? 누구냐고요? 당신이죠. 직접 경고해주러 온 저를 무시하고 들어가려 하시네요?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나요?” “아니 뭐 ..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

“오늘 좀 피곤해 보이는데?” “어...” “잠이라도 설쳤어?” “그냥 던진 말이겠지만 넌 촉이 좋단 말야. 진짜 이상한 꿈을 꾸긴 했거든... 무서운 꿈이라고 해야 되나?” “그 뭐더라? 네가 말했던 1년에 몇 번 없다는 그 날이었나 보네?” “응. 평소엔 혼자 지내도 아무렇지 않은데, 이상하게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오싹한 밤이 있어. 어제 꿈도 좀 뒤숭숭해” “말해 봐. 어떤지는 내가 듣고 얘기해줄게” “어... 그게... 꿈속에서도 새벽 두 세 시 쯤 됐던 것 같아.” “시작부터 음침하네” “정확한 앞뒤 정황은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웅장한 석조 건물 내부를 핸드폰 조명만 가지고 헤매고 있었어. 바닥은 아주 차가운 대리석이었고, 정말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았지.” “음...” “아마 1층 중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