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말을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할 수 있는 거죠? 그 얘기를 듣고 너무 어이없어서 화가 났어요.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고, 그게 그렇게 피해자와 가족들로부터 쉽게 용서받을 일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아…. 그건 말하기 쉬운 얘긴 아니지만….”


“그 뻔뻔함에 대해서 인정하겠다는 건가요?”


“당신이나 저, 그 가해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한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크고 작은 변화를 겪으며 이뤄온 생각과 그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는 말이었어요. 그 대답이 나오게 된 과정을 공유하고,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없이요.”


“그렇겠죠. 하지만, 그 살인자를 저와 비슷하게 취급하진 말아주세요. 그런데 말씀하신 내용은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하고 그냥 속 편하게 넘기라는 거…. 아니죠?”


“음. 일단 이것부터 시작해보죠. ‘비유해서 설명하는 것’ 말이에요.”


“비유요? 그렇긴 하죠. 종교에서는 많은 것들을 비유해서 설명하던데, 그럼 용서받았다는 것도 일종의 비유라는 얘긴가요?”


“잠깐. 제가 얘기해드릴 테니까 천천히 들어보세요.”


“제가 좀 급해졌네요. 흥분했나 봐요.”


“아마도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을 더 설명드려야 될 것 같아요. 아무튼 비유에 대한 제 생각을 먼저 말씀드릴 테니 들어보세요. 중요한 것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실 비유라는 것은 엄연히 그 비유하는 본질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들이라는 거예요. 설명하고 싶은 본질을 모르는 상대에게, 일상에서 익숙한 것들을 조합해서 그 본질의 어떤 희미한 분위기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 같은 거죠. 여기까진 어떤가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가네요.”


“내 마음은 갈대가 아니지만,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봤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겠죠. 그 이미지의 희미한 분위기가 갈팡질팡하는 어떤 마음의 작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마중물 역할을 하는 거예요. 가장 보편적인 경험을 도구 삼아서 특별한 경험을 설명하는 거죠. 언어의 완벽하지 못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최종 단계까지 가려면, 이 대화를 한 학기 동안 들어야 될지도 모르겠네요.”


“음. 먼저 짚어두고 싶어서 그랬어요. 비유로 설명하는 것들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기도 하고, 본질과 아무 상관없는 것들에 대한 꼬투리 잡기 같은 소모적인 대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다음에 나올 얘기에 이어지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네. 저도 최대한 착한 탐험가의 마음으로 참여해보도록 하죠.”


“흔히 우리가 말하는 절대자의 개념을 볼 때, 성경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어요. 성경에서 그렇게 말한 것을 다르게 해석하면 불경한 것이 되겠죠. 하지만 그 의견이 달랐고, 각자 깊이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종파로 나뉘게 된 거예요. 같은 하나님인데 다른 하나님이 되어버렸죠.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절대자의 존재라는 건 우리의 모태가 되는 형체인 인간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그건 일종의 상징 같은 게 아닐까 라고요.”


“그럼 무슨 형태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저는 절대적인 신의 개념은 아무 형태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게 가능하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절대적인 개념의 존재는 분명 있어요. 물론 인간적인 시각에서 그런 거죠. 그런데, 그 볼 수 없지만 느껴지는 존재를 인격화 했을 때 나타나는 이점은 아주 많다는 거죠. 이것이 아까 말했던 비유라는 개념으로 생각해 봤을 때, 상대방에게 나의 경험과 감정을 전달하는 데 있어 아주 큰 유리함이 되는 거죠. 사람이 어느 정도의 정신적 깊이를 가지게 되는 데 있어서 종교라는 것이 큰 작용을 한다는 어떤 전문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사람들로부터 추천받은 이른바 ‘지혜로운’ 인물들에 대한 인터뷰였는데 그런 공통점이 있었다고 해요. 어찌 됐든 그런 측면에 있어서 신이라는 존재가 인격화 되어있지 않았다면, 여러 관념적인 것들을 사람들이 서로 말하고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이해하는 것에 도움되는 것도 당연하고요. 기독교에 삼위일체, 성육신 개념이 있는데 이것까지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네요…. 갑자기 드리는 질문이긴 한데,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지금 말한 절대자의 개념을 얘기하는 건가요?”


“비슷해요. 저는 인간의 가장 큰 특징으로, 관념적인 것들을 구체적이고 실존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을 들고 싶어요. 특히 그런 관념적인 다수의 것들을 머릿속에서 구체화해서 합치고 계산하고 적용해보는 아주 다양한 것들을 할 수 있죠. 감정이라든가 법률이라든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자유롭게 떠올려볼 수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치 그것이 실존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변형시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말하죠. 종교라는 것은 외부에서 전해주는 개념이 아니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 심겨 있던 씨앗이 싹을 틔우는 거라고. 구원이 집단적으로 한 번에 주어지는 게 아니고, 개인적인 차원을 넘을 수 없는 이유는 몇 가지 더 설명할 것이 있겠지만 대략 그런 의미가 있어요.”


“잠깐만요. 그래서 살인자가 뻔뻔하게 말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쯤 나오나요?”


“쉽지 않네요. 신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오셨어요?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요즘 신은 그냥 초능력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에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절대자의 개념은 그게 아니에요. 우리의 차원을 벗어난 아주 초월적인 존재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영화에 나오는 건 신이 아니라 그냥 ‘히어로’라고 하잖아요?”


“맞아요. 분명히 절대자의 존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힘이에요. 히어로 정도가 아니죠. 그렇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세상이라고 부르는데, 그런 차원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보거나 느껴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서로를 이상하다고 생각하곤 하죠. 그런데 만약”


“만약?”


“당신은 지금 절대자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지만…. 그냥 지금 가정해본다면 어떨까요? 만약 그 절대자라는 존재가 정말로 상상을 초월할 수 없는 압도적인 것이고, 또 정말로 존재한다면요?”


“내키진 않지만 그렇게 생각해볼게요. 그래서요?”


“그 존재를 우리가 이해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일 거예요. 인간은 인간답게…. 아니, 서로 불편하지 않도록 사회적인 약속을 해요. 그런데 그건 인간끼리의 규약일 뿐이고, 절대자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법이라는 건, 법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죄를 처벌할 수 없어요. 왜냐면 그전까지는 죄가 아니었으니까요. 말장난 같지만, 어떤 언어와 논리적인 장치로 정의하기 전까지 그것은 그것이 아니기도 했어요. 언어라는 도구가 생기면서 일어난 많은 변화와 제약들이 지금 사회의 모습이죠. 아무튼 이걸 말하는 건 아니지만”


“자꾸 여러 가지 얘기들을 하니까 혼란스럽네요.”


“아무튼 다시 얘기해보죠. 절대자의 입장에서 그런 인간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사람이 길 위에 지나가는 개미를 봤다 쳐볼게요. 이것도 어쩌면 비유예요. 꼭 개미를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본질과 다르지만 그냥 예를 들기 위해 설명했다고 생각해주세요.”


“네.”


“그 개미가 서로 물어뜯고 한 마리가 죽었다고 친다면 우리 입장에서 어떤 감정이 들까요? 그 개미의 가족끼리 서로 슬퍼하고 억울해한다 쳐도,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을 거예요. 동물은 사람이 구경하는 앞에서 수치심 없이 교미를 해요. 그런 장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 그런 높은 차원의 시선이 절대자의 시선이 될 수 있다? 그런 얘긴가요?”


“저는 제가 생명을 경시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짚어두고 싶어요. 살인은 당연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죠. 사회의 안정을 흔드는 일이에요. 하지만 절대자의 입장에서 인간의 죽음은 어느 정도 문제가 되겠지만, 큰 이슈가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물론 인간에게는 삶의 큰 문제를 차지하는 사건이 되겠지만요. 저 역시 어떤 이유에서건 살인사건에 대해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겠는데요? 그런 식이라면….”


“맞아요. 극단적인 종교 주의자들이 그런 논리에 빠져서 자기들이 신의 사자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낙인찍고 죽이는데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도 해요. 과거에 그런 일들이 많았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아주 대략적인 이야기예요…. 이런 개념들이 서로 얽혀서 그 범죄자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그건 이기주의적인 말이었을 수도 있어요.”


“아주 이기적인 거죠.”


“맞습니다. 절대자를 접한 사람들 일부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극단적인 이기주의자가 되기도 해요. 성경에는 그런 것에 대한 경고도 하죠. 세상 사람들과 따로 살지 않는 이상 세상의 윤리에 따를 책임이 있다고. 보통 기독교를 관통하는 코드를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보통 이것에 괴리감 있는 행동이나 말은 뭔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의 명령이다. 신께서 용서하셨다. 이런 말과 행동이 진실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지금 제가 질문드린 가해자는 어떤가요? 피해자의 가족이 지켜보고 있는데 말이에요. 그냥 상식선에서 봐도 말이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물론 제 일이 아니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서 그래요.”


“성경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그게 선한 것이었는지 악한 것이었는지를요. 만약 그 범죄자가 서슴없이 나는 신에게 용서받았다는 말을 했는데 상처 받은 사람이 있었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거라고 얘기할 수 있을 거예요. 종교는 아까 말했듯이 매우 개인적인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그 거짓말에 속아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하지만, 나의 양심과 절대자의 시각은 그 사람…. 본인의 실제 모습이 현실과 전혀 다르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어요.”


“그럼 그 범죄자가 정말로 신께 용서받았더라도 조용히 했어야 하나요? 아니면 그냥 피해자 가족을 괴롭히려는 변태 같은 생각으로 허풍 떠는 걸까요?”


“저는 그래도 그 범죄자가 죄를 뉘우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절대자로부터 받은 용서? 그것은 아마 초심자로서 기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을지 모르죠. 그래서 여기저기 떠들어 댔을 수 있고요. 성경이라든가 하나님의 생각을 이해하고 따라간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영적인 성숙을 이룬 사람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응답받은 것에 감사하면서,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겠죠. 이게 보편적이고 상처 주지 않는 윤리적인 길이기도 하지 않나요? 사실, 타인의 생각을 헤아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영적인 성숙, 지혜의 성장, 생각의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에요. 그 사람의 말을 사실로 가정한다면 영적인 미숙아의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진정한 구원과 용서라면 나와 절대자만 아는 것으로 충분한 겁니다.”


“하아.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게 어떤 식의 위로인지, 용서인지, 정신승리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음속에 품고만 있어도 될 것을 왜 굳이 말해서 화를 돋우는 건지 정말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만 행동해준다면야 일반인들도 상처 받지 않을 텐데 대체 왜들 그런답니까?”


“사랑에 대해 설명한 성경 구절이 있는데 그중 한 구절에 정확하게 자랑과 교만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쓰여있기도 해요. 뭐,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자랑할 기회를 노리는 존재이기도 하고 말이죠…. 그래도 우리가 알고 있는 미꾸라지 같은 종교인의 탈을 쓴 사람들 뒤에,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은 확실해요. 교회에 그런 말이 있거든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일하는 사람이 많다고요. 가려졌다고 없는 것은 아니에요.”


“정확하게 답을 들은 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가 가진 의문에 대한 해답에 근접한 이야기였던 것 같네요. 아까는 좀 흥분해서 어떤 한마디의 정답만 듣고 싶었는데 말이죠. 그래 봤자 볼수록 나쁜 사람인 건 변함없지만.”


“이런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딱 하나로 정해진 정답은 없다고 생각해요. 요즘에 그런 게 유행이라죠? 밸런스 게임? 말도 안 되는 두 가지 상황 중에서 굳이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임인데 생각의 여지를 닫아버리는 일종의 습관 같은걸 만드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재밌자고 하는 놀이지만, 어쩌면 그런 생각의 귀찮음과 효율성이라는 덫이 그런 게임까지 만들었는지도 모르죠. 사실 세상 대부분의 것은 대체 가능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요. 그게 물질이든 관념적인 것이든 말이에요.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건 내 주변에 얼마 없거든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뭔가를 설명한다는 일은 사실 쉽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것들이 정답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설명한 건 더더욱 아니니까요. 한 줄 요약 같은 건 없지만, 제가 했던 이야기들이 어떤 작은 단서 같은 게 되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기를 바랍니다.”


“네. 한 마디 정답이라는 건 사실 없는 거겠죠. 생각해보니 아인슈타인 이후의 물리학자들이 어떤 ‘하나로 설명되는 절대적 이론’을 찾고 있다는 얘기가 생각나네요. 그걸 발견하기 어려운 만큼 제가 생각했던 대답을 왜 한 마디로 할 수 없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네요.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식사나 하러 가시죠.”




* 예전에 영화 ‘밀양’을 봤었습니다. 한참 후인 최근에 여러 생각이 들어서 가상의 대화를 적어보았습니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 정도로 가볍게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BGM♪ Vincent Blue ‘무지개는 있다(Band Ver.)’

사진. 글 ⓒcomposition83

Posted by C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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